릴리앙 튀랑 - 그의 이야기

릴리앙 튀랑 - 그의 이야기



월드컵 우승과 두번의 세리에 A 우승이라는 이력을 가진 릴리앙 튀랑은 2009년 선수 생활 은퇴 전부터 정치인으로서 자질을 보였다. 대게 많은 선수들이 은퇴 후 지도자 과정을 밟는다. 하지만 모나코, 파르마, 유벤투스, 그리고 바르셀로나에서 다양한 경험을 쌓은 릴리앙 튀랑은 은퇴 후 축구장을 벗어나 다른 길을 걷기로 결정했다. 과달루페라는 프랑스령 섬에서 태어난 튀랑은 1981년, 9살의 나이에 가족과 함께 파리의 외곽 지역으로 이민을 갔다. 폰테인블루의 지역팀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한 그는 1991년 Stade Louis II에서 아르센 웽거 감독의 지휘 아래 프로 데뷔를 하게 되고, 이때부터 그는 한 시대를 풍미하는 최고의 수비수로 성장하게 되었다.

그의 선수 생활 중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대표팀 시절이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유니폼을 입고 142경기에 출전했고 특히 1998년 월드컵에서 중요한 골을 넣으며 팀을 결승전에 올려 놓았다. 프랑스가 우승을 하리라 예상했던 자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튀랑은 항상 프랑스인으로서 자긍심과 품위를 보여줬다.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의 선수생활이 화려하고 아름답게 비추어질 것이다. 하지만 튀랑의 선수생활은 항상 인종 차별 문제로 인해 순탄치 않았다. 이러한 얼룩을 지워내고자, 그는 은퇴 후 정계로의 진출을 택했다. 프랑스 대표팀의 1998년 월드컵 우승을 기념하는 자리에서 튀랑은 이탈리아에서의 좋지 않은 기억을 사람들과 공유했다. “참 웃겨, 너네 흑인들은 왜 항상 그렇게 몰려 다니는거야?” 라는 소속팀 코치의 질문에 튀랑은 “저 쪽을 보시면 백인들도 항상 모여서 웃고 떠들어요. 대체 저희와 다른 점이 뭐죠?” 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단순히 한두번에 그친 일화가 아니기에, 이러한 상황들은 튀랑의 정의감을 한층 북돋기에 충분했다. 튀랑은 1998년 그의 첫 아들의 이름을 미국 출신 유명한 흑인 사회 평등 운동가인 Marcus Garvery의 이름을 따 지었다.

1998년 당시, 자국 월드컵에서의 성공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역할을 했던 튀랑이기에 그가 받은 차별적 대우는 절대 합당하다고 할 수 없었다.

그가 조국을 위해 득점한 골의 개수는 단 2개에 그치지만, 그가 기록한 골들은 상당히 중요한 순간에 터졌다. 1998년 월드컵, 프랑스는 크로아티아를 상대로 1:0으로 전반전을 끝마치며 기선을 제압했다. 하지만 월드컵의 명성에 맞게 로랑 블랑의 터무니없는 퇴장으로 인해 힘겹게 리드를 이어가고 있었고 그 순간 프랑스에게 영웅이 나타났다.

후반전이 시작하고 2분이 지나고, 릴리앙 튀랑은 상대 패널티 박스 근처에서 지네딘 지단과 원투 패스를 주고받으며 그 어떤 공격수도 쉽게 보여주지 못할 장면을 보여줬다. 또한, 후반 중반 그는 다시 볼을 쟁취해 강력한 왼발 슈팅을 날리며 엄청난 골을 성공시켰다.



강력한 그의 슈팅은 결승골이 되었고, 그는 팀 동료들이 기쁨을 나누기 위해 달려오기 전 무릎을 꿇은 채 깊은 생각에 빠진 듯한 차분한 골 셀러브레이션을 선보였다. 그의 골 셀러브레이션이 1968년 멕시코 시티 올림픽 당시 200미터 육상 경기에서 보여준 미국의 Tommie Smith와 John Carlos의 세레머니를 연상하는 행동을 취했냐는 질문에 "특별한 의미는 없었습니다."라고 답했다. 튀랑의 골 셀러브레이션은 큰 의미가 없었을지 몰라도 프랑스의 우승은 그에게 큰 의미를 지녔다.

"처음에는 정치적인 부분에 있어서 영향을 끼칠 수 있을지 확신이 서지 않았어요. 하지만 그와 동시에 긍정을 잃지 않았죠." "프랑스라는 나라는 여러 인종이 함께 어우러진 나라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각인시켜줄 것이고, 인종의 다양함에 있어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만큼 완벽한 예는 없다고 생각 했습니다. 아시아 출신 선수가 없다는 것이 조금 아쉽지만요." "어쨌든, 굉장한 상징성을 보여준 중요한 순간이었습니다."

1998년 프랑스 대표팀의 성공이 인종 차별 운동에 활력을 불어넣었을지라도 튀랑이 꾸준하게 겪어온 고통을 보면 완벽한 치료제라고 할 수는 없었다. 확실한 것은 그의 국가대표 경력이 끝나기도 전에 튀랑을 이용해 이득을 취하려는 우파 정치인들이 많았다.

2018년 대회를 앞두고 프랑스 탑 스코어러이자 튀랑의 고향친구인 티에리 앙리는 "'원팀'이라는 기분이 너무 빨리 사라졌어요." 라고 L'Equipe에게 말했다. "안타까워요. 그래도 잠깐 동안 우리 모두가 같은 프랑스인이었거든요. 피부색과 관계없이 말이죠. 값을 매길 수 없는 소중한 시간이었죠." 8년 뒤 독일에서 열린 2006년 월드컵 명단에도 튀랑은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Jean-Marie Le Pen이라는 프랑스 극우파 정치인에게 꼬투리를 잡혔다. 그는 대표팀 명단에 대해 "과연 나라를 대표하는 팀인지에 의문이 든다. 아마도 대표팀 감독이 실력보다는 다양한 인종을 선발하는데 의의를 둔 것으로 보인다." 라며 비꼬았다. 튀랑은 이와 같은 반응에 즉각 반박했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Jean-Marie Le Pen이 흑인 프랑스인, 백인 프랑스인, 갈색의 프랑스인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은 것 같아요. 이러한 무식함은 차기 대선주자에겐 치명타일 것이며, 프랑스의 역사와 사회를 분명히 잘 모르고 있는 사람으로 여겨지네요."

"Jean Marie Le Pen에게 한마디만 하겠습니다. 프랑스 대표팀 모두는 프랑스인이라는 사실이 너무 자랑스럽습니다. 만약 당신이 우리에게 불만이 있다면 그건 당신의 문제지만 우리 모두는 이 나라를 대표한다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Vive la France (프랑스 만세)! 그가 원하는 프랑스가 아닌 우리 모두의 프랑스를 위하여." 프랑스는 월드컵 결승에 안착했지만 승부차기에서 이탈리아에게 패했고 튀랑은 이후 2년 더 국가를 위해 뛰었다.

선수 생활 은퇴 후 그는 정계 생활을 더 활발히 했고 사회 불평등과 성소수자 인권 이슈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중에서도 그는 인종 차별에 관한 문제에 대해 더욱 더 자신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2010년 그는 릴리앙 튀랑 재단을 설립하며 많은 이들에게 인종 차별에 대한 사고 방식을 가르치기로 결심한다.

"제가 바르셀로나에서 축구를 할 당시, 프랑스 대사관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던 연륜이 있던 한 신사분이 제게 나이를 들면 뭘 할건지 물어본적이 있어요.” 튀랑은 자신의 재단을 설립한 이유를 되새기며 이렇게 말했다.



"저는 마치 어린아이처럼 대답했어요, 세상을 바꾸겠다고! 학교들을 돌아다니며 인종차별에 대한 인식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문화적인 실태라고 말 할거라고요." "우리는 절대 인종차별주의자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인종차별주의자로 키워지는 것이라고 말이죠."



46세의 튀랑이 두려워할 만한 존재는 없어 보인다. 이는 그가 미국 대통령인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엘 살바도르, 타이티, 그리고 특정 아프리카 나라들을 "똥통" 이라고 표현했을 때 아주 강력하게 비판한 사실을 봐도 알 수 있다. 그는 특유의 직설적인 스타일로 그를 비판했다. "트럼프는 항상 적을 만들죠. 흑인, 백인, 그리고 백인이 아닌 사람들. 좋은 나라, 좋지 않은 나라. 그는 피부색을 기준으로 선을 그었습니다. 그들과 우리. 명백한 인종 차별이죠." 그는 많은 이들에게 인종 차별에 대해 널리 알리는 것만큼 교육도 중요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유벤투스 소속의 블라이스 마투이디 선수가 1월 6일 칼리아리에서 모욕을 당했는데, 이는 그의 아름다운 갈색 피부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그는 말했다. "저는 1996년 당시 이탈리아에서 뛰고 있었는데 종종 원숭이 소리를 내는 팬들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사실을 미루어 보았을 때 20년이 지난 지금도 교육이 성공적이었다고 보기는 힘듭니다. "이 모든 것이 바뀌기 위해서는 인종차별에 고통받는 선수들이 나서는 것 보다는 백인 선수들, 백인 감독들, 백인 팬들이 나서주는 것이 중요해요." 그라운드 위에서 체계적이었고 철저했고 효과적이었던 만큼 튀랑은 그라운드 밖에서도 이같은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번엔 그의 목표가 훨씬 더 위대할 뿐이다.